망자의 한을 달래며
거창민간인학살 사건

진주법원에서 민사합의부 부장판사로서 거창민간인학살사건과 관련된 소송을 2건 다룬 적이 있다.
하나는, 나라에서 거창사건특별법에 따라 수백억 원을 들여 시행하려던 위령사업의 입찰절차에서 불거진 사건이었고, 둘째는, 거창사건 유족들이 나라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사건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먼저, 거창사건의 발생과 그 동안의 유족들의 명예회복 노력을 알아볼 필요가 있는데, 이 부분은 나중에 보게 되지만 위 손해배상사건의 판결문에서 그대로 인용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사관(史官)이 된 심정으로 당시 제출된 모든 증거와 증언을 종합하여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하여 보았다.

“가. 거창민간인학살사건의 발생
(1)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인민군의 낙동강 도강작전 중에 국제연합군의 참전으로 인민군은 후퇴하기 시작하였고,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어 인민군의 북상이 차단되자 그 패잔병들은 지리산 등 산악지역으로 들어가 지방 빨치산세력(남해여단)과 합세하여 지리산 주변 민가에서 식량을 조달하며 후방교란작전을 시작하였다. 이에 피고는 1950년 12월 공비소탕작전을 전담할 육군 제11사단(사단장 최00 준장)을 창설하고 사단사령부를 전남 남원에 두고, 예하부대로 전북 전주에 13연대, 광주에 20연대, 경남 진주에 9연대를 배치하였으며,9연대는 예하부대로 경남 함양군에 1대대, 경남 하동군에 2대대, 경남 거창군에 3대대를 배치하여 공비 토벌작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2) 그런데I 제11사단은 신설부대로서 훈련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 게릴라전에 대한 경험도 부족하고 그 작전지역도 광범위하여 부족한 병력으로 공비토벌작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곤란하였다. 이에, 제11사단장 최00 준장은 공비토벌작전의 기본방침으로 「견벽청야」(堅壁淸野)라는 작전개념을 내세웠는데, 그 내용은 ‘반드시 확보하여야 할 전략거점은 벽을 쌓듯이 견고히 확보하고, 부득이 포기하는 지역은 인원과 물자를 철수하고 적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없앰으로써 적이 발붙일 수 없는 빈 들판을 남겨준다’는 것이었다.
(3) 한편,1950년 12월 5일 지방 빨치산이 거창군 신원면에 있는 경찰지서를 습격하고 신원면 일대를 장악하였는데, 거창경찰서는 경찰력으로 그 수복을 시도하였으나 계속 실패를 거듭하게 되어, 그 임무는 결국 9연대가 맡게 되었다. 그 뒤,1951년 2월 초순경 9연대장 오00 중령은 함양, 거창, 산청 등 지리산 남부에 출몰하는 공비 소탕을 위하여 연대합동작전을 결정하였는데, 그 작전 내용은 함양의 제1대대(대대장 이00 소령),하동의 제2대대(대대장 임00 소령),거창의 제3대대(대대장 한00 소령)가 각각 담당 지역에 있는 공비를 소탕하면서 산청 방면으로 진격하여 지리산 남부에서 합동작전을 편다는 내용이었다(그 작전을 위하여 신원면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주민들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4) 그 때 작전 개시에 앞서 연대장 오00 중령은 각 대대장을 불러 사단사령부에서 내려온 공비토벌작전의 기본방침인 「견벽청야」라는 작전개념과 구체적인 작전명령을 시달하였고(각 대대장들이 받은 구체적인 작전명령의 내용은 ‘적의 손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 또는 작전수행 중 미수복지역에 남아 있는 주민은 적으로 간주, ‘총살하라’는 것이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특히 3대대장 한00 소령에게 1950년 12월 5일 거창군 신원면에서 지서습격사건이 있었다는 사정을 알리고 그 일대를 공비오염지구로 보아 공비를 철저히 토벌할 것을 지시하였다.
(5) 이에,3대대장 한00은 1951년 2월 7일 3대대 병력을 이끌고 거창농업학교에서 출발하여 신원면에 진입하였으나 공비를 발견하지 못하고 경찰과 청년의용대만을 남겨둔 채 연대합동작전을 위하여 산청 방면으로 행군하였다. 그 다음날 연대장 오00은 3대대를 찾아와 공비들이 신원면에 남겨둔 경찰과 청년의용대를 습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3대대장 한00에게 호된 질책을 하였고(연대장 오00은 대대장 한OO이 위에서 지시한 구체적인 작전명령대로 작전을 수행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공비들이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신원면을 습격하였다고 하면서 위 작전명령대로 하라고 지시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그 역시 분명하지 않다),이에 한00은 3대대 병력을 이끌고 다시 신원면으로 돌아가 공비토벌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3대대는,
① 1951년 2월 9일 새벽 신원면에 들어와 거창읍으로 행군하던 중 신원면 덕산리 청연마을 78세대 민가에 불을 지르고 주민 80여 명을 눈이 쌓인 마을 앞 논으로 강제로 끌어내어 군용무기로 무차별 사살하였고(그 현장에서 선정자 89 김00만 어머니의 시체 밑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② 그 뒤 거창읍으로 빠져나가 날이 저물자 재차 신원면으로 진입하여 내동마을과 오례마을에 주둔하던 중 다음날인 1951년 2월 10일 신원면 소재지로 이동하여 과정리, 중유리, 대현리, 와룡리에 병력을 투입하여 전 민가에 방화하고 대현리, 와룡리 주민들을 소개한다는 이유로 남아 있는 전 주민을 면 소재지로 집결시키던 중 날이 저물자 대열을 이루며 끌려가는 주민 중 노약자 20여 명을 강변도로에서 사살하고, 뒤에서 끌려가는 노약자, 부녀자, 어린이들 100여 명을 신원면 대현리 탄량골 계곡에 몰아넣고 역시 군용무기로 무차별 사살하고 나뭇가지를 덮어 기름을 뿌려 불을 질렀으며(그 현장에서 임00만 살아남은 것 같으나 확실하지 않다),
③ 1951년 2월 10일 오후 과정리, 중유리 전 주민과 대현리, 와룡리의 주민 1,000여 명을 신원초등학교에 강제로 수용하고 1951년 2월 11일 주민 1,000여 명을 분류하여 군인가족, 경찰가족, 공무원가족, 청년당원가족은 귀가시키고 남은 540여 명의 주민을 신원초등학교에서 700m 떨어진 박산 골짜기로 몰아넣고 그 중 12명을 주위에 대기시키고는 기관총과 개인총기로 무차별 사살하고 나뭇가지를 덮어 불을 지른 뒤(역시 그 현장에서 정00만이 큰 바위 밑을 결사적으로 파고 들어가 살아남았다),대기시킨 12명으로 하여금 희생자들이 모두 사망하였는지 확인하게 한 다음 11명은 사살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문00이 살려달라고 필사적으로 애원하자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위협한 뒤 그대로 철수하였다(위 3곳의 민간인학살사건을 이하 “거창사건”이라고 한다).
(6) 거창사건의 희생자는 1951년 2월 9일 청연골에서 84여 명,1951년 2월 10일 탄량골에서 100여 명,1951년 2월 11일 박산골에서 517여 명, 기타 지역에서 18여 명으로 모두 719명이며, 연령별로는 10세 미만 313명,11세-50세 340명,60세 이상 66명이었고, 성별로는 남자 327명, 여자 392명이었다(이 숫자는 거창사건 후 9년이 지난 뒤인 1960년 5월 23일경 국회 진상조사단이 확인한 숫자인데,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기 어려우나 최소한 그 이상인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나. 거창사건 은폐 시도와 국회조사단의 활동 및 관련자 처벌
(1) 거창사건 발생 후 경남지구계염사령부 등은 원고 등을 포함한 그 주변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사건 현장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철저히 막았으나, 그 주변지역으로 거창사건에 대한 소문이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그 며칠 뒤 원고 이철수 등이 헌병사령부에 제보를 하여 헌병대가 그 진상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2) 그러나, 그 당시 국방장관인 신성모는 외국의 원조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와중에 군의 비행이 외국에 알려지면 전쟁수행에 지장을 초래하고, 군의 사기를 해친다는 등의 이유로 거창사건을 적극 은폐할 것을 지시하였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창사건은 결국 외부로 전파되었고,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이 1951년 3월 29일 국회본회의에서 거창사건을 폭로하여 급기야 1951년 3월 30일 국회가 내무, 법무, 국방부와 합동으로 진상조사단을 구성하게 되었다.
(4) 국회조사단이 1951년 4월 7일에 거창사건 현장을 답사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신성모 국방장관 등은 거창사건을 은폐하고자 국회조사단이 내려오기 4-5일 전쯤에 3대대장 한00으로 하여금 부하장병 100여 명을 출동시켜 사건현장의 출입을 막고, 박산골 희생자 시체 가운데 윗부분에 있던 어린이의 시체를 대충 가려내어 그 곳으로부터 약 2km 떨어진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 홍동골로 옮겨 암매장하도록 하였고, 경남지구계엄사령부 민사부장 김00 대령은 신성모 국방장관과 모의하여 사전에 학살현장을 은폐시키고,9연대 정보참모 최00 소령이 인솔하는 수색소대로 하여금 공비로 위장하여, 신원면으로 통하는 험준한 수영더미 고개에 매복한 뒤 국회조사단에게 총격을 가하여 현장답사를 저지시킬 것을 지시하여,1951년 4월 7일 국회조사단이 거창사건 현장으로 가기 위하여 위 수영더미 고개를 지나려 하자 미리 공비로 위장한 위 수색소대가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국회조사단은 사건현장에 접근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철수하게 되었다.
(5) 신성모 국방장관의 은폐 기도에 따라 정부는 1951년 4월 24일 거창사건의 희생자는 187명으로서 모두 공비들과 통모하여 이들을 도와준 자들이며 신원면 주민 중 군경가족, 노약자, 부녀자들, 개전의 정이 있는 자 등은 모두 제외한 뒤, 신원초등학교에 고등군법회의를 설치하여 재판을 한 결과 187명을 유죄로 인정하여 사형을 선고하고, 이어 이들을 현장에서 총살할 것을 대대 정보장교에게 명령하여 2월 12일 신원초등학교 근처에 있는 박산골에서 개별적으로 사형을 집행하였다고 발표하였다.
(6) 그 뒤, 신성모 국방장관이 해임되고 또 국회에서 1951년 5월 14일 거창사건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관련자를 처벌하여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자 거창사건에 대한 수사가 재개되었다. 1951년 7월 27일 거창사건이 발생된 지 5개월여 만에 대구고등법원에서 열린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거창사건 관련 책임자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고(정부가 축소, 왜곡하여 발표한 대로 공비들과 통모한 187명을 살해한 혐의 등으로만 기소된 것으로 보인다),1951년 12월 15일 군검찰관은 9연대장 오00 대령에게 사형,3대대장 한00 소령에게 사형, 정보장교 이00 소위에게 징역 10년, 경남계엄사령부 민사부장 김00 대령에게 징역 7년을 구형하였는데, 위 중앙고등군법회의는 1951년 12월 16일 오00에게 무기정역, 한00에게 징역 10년, 김00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였다{총살형을 집행하였다는 이00에게는 무죄를 선고. 그리고 오00 등은 거창사건 당시의 연대 작전명령서를 국회조사단의 방문 무렵에 문제된 부분(작명 제5호 부록)을 임의로 수정하였다는 이유로도 기소되었으나, 위 중앙고등군법회의는 범의가 없거나 국방부장관의 명령을 단순히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는 등의 이유로 오00 등에게 그 부분에 대하여는 무죄를 선고하였는데, 원래의 작전명령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현재로서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실형을 선고받은 오00,한00, 김00은 모두 1년여 만에 다시 석방되어 복직되었다.

다. 유족들의 명예회복 등을 위한 계속된 활동
(1) 한편, 거창사건 희생자들의 시신은 그대로 3년여 넘게 방치되다가(박산골 희생자 중 윗부분에 있던 어린아이의 시체는 3대대가 국회조사단의 현지방문 며칠 전에 이를 가려내어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 홍동골에 갖다 묻었는데, 유족들은 그 당시 분위기에 눌려 나머지 시신은 발굴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일부 국회의원과 유족들이 1954년 음력 3월 3일 학살현장에 흩어져 있는 희생자들의 유골을 모았으나 그 신원을 알 수 없어 큰 뼈는 남자, 중간 뼈는 여자, 작은 뼈는 어린이로 구분하여 화장을 하고, 박산골에 남자 합동 묘, 여자 합동 묘, 어린이 합동 묘를 만들어 매장하였다.
(2) 그 뒤,1960년 5월 11일 박산 합동 묘에 위령 묘비와 상석을 세우던 유족들은 거창사건 당시 주민들의 성분을 가리는 데 참여한 신원면장 박00가 주민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공비로 몰아 사살되도록 하였다며 박00를 성토하다 박00를 데려와 사과를 받으려고 하였는데, 거창경찰서장이 인솔한 경찰이 이를 가로막고 박00 면장을 데려가려고 하자, 흥분한 유족들이 박00를 향하여 돌을 무수히 던짐에 따라 결국 박00는 심한 두개골 파열로 치명상을 입는 등으로 현장에서 사망하게 되었다(그로부터 1년여가 지나 이른바 군사혁명정부가 들어서자, 박00 면장 친척의 고소로 유족대표인 문00, 어00, 임00, 문00, 이00 등이 이 사건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는데,1962년 9월 6일 경남지구계엄보통군법회의는 문00 등에게 집행유예를, 김00, 정00에 대하여는 무죄를 선고하였다).
(3) 그리고,1960년 5월 23일경 국회조사단이 1개월간 거창사건을 현지 조사하고 또 1960년 11월 18일에는 거창사건희생자 유족들이 박산 합동묘소 위령비 제막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4) 그러나,1961년 5월 18일 이른바 군사혁명정부는 원고 문00 등 유족대표들을 반국가단체 조직 혐의 등으로 구속하여 수사하고(원고 문00 등은 1962년 7월 13일 혐의없음 처분을 받았다),1962년 6월 15일경 위 묘소의 위령 비문은 국군을 모독하는 내용이 있다는 이유로 정으로 지워 땅에 파묻어버리는 한편, 경남도지사 명의로 유족들에 대하여 희생자별로 개인 묘를 쓰도록 개장명령을 하고 합동분묘의 봉분을 파헤쳤다(그 후 1967년경에 합동분묘를 다시 복구하게 되었다).
(5) 거창사건 이후 계속하여 유족들은 거창사건의 유족이라는 이유로 공무원 등에 임용되지도 못하고, 또 거창사건을 언급하는 것조차 못하도록 감시를 받게 되었으며, 유족들 역시 거창사건의 유족들이라는 사실마저도 숨긴 채 살아가게 되었는데,1980년 이후에 와서야 유족들은 합동묘소 위령비 원상회복 및 거창사건 희생자 명예회복과 배상을 1982년 6월 1일 전두환 대통령에게,1988년 1월 24일 노태우 대통령에게 반복하여 진정․호소하였으나, 피고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유족들은 1988년 2월 15일 “거창 양민학살 희생자 위령추진위원회 발족 및 궐기대회”를 열고 박산 합동묘소까지 가두행진을 하면서 전 국민에게 명예회복 및 손해배상에 관한 호소문을 발송하였다. 그리고 1988년 11월 7일부터 3일간 거창사건 희생자 유족 300여 명이 국회의사당, 통일민주당사, 평화민주당사 앞에서 각기 시위를 계속하여 당 대표들로부터 특별법 제정에 대한 약속을 받는 등 활동을 계속한 결과,1989년 9월 19일 거창양민학살사건명예회복및배상에관한특별법안이 국회의원 165명에 의하여 발의되었으나 회기 내에 입법이 안 됨으로써 폐기되고, 그 뒤, 유족대표 등이 수차례에 걸쳐 국회의원을 면담하고, 시위, 청원 등을 함에 따라,1995년 12월 18일 거창사건등관련자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조치법(1996. 1. 5. 법률 제5148호, 이하 “거창사건특별법”이라 한다)이 제정되었고,1998년 2월 17일 거창사건특별법 및 그 시행령에 의하여 설치된 거창사건등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서 유족등록신청을 받아 이를 심의한 뒤, 거창사건으로 548명이 사망하였으며, 그 유족은 785명이라고 결정하였다(일정기간 동안 유족등록신청을 받은 것만을 근거로 그 희생자와 유족을 심의, 결정하였으므로, 희생자 숫자는 위 국회 진상조사단이 확인한 숫자에 미치지 못할 수밖에 없고, 유족 숫자는 각 희생자별로 유족을 인정하여 단순합산하였으므로, 중복된 경우를 고려하면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거창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사업은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경남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 부지에 역사교육관, 유영봉안소, 위령탑, 일주문, 묘역 등이 있는 대규모 추모공원 162,425제곱미터를 조성하는 공사이다. 2000년 9월 19일 거창군의 입찰을 거쳐 공사가 시작되려고 하던 중에 입찰에서 탈락한 업체가 거창군과 낙찰업체를 상대로 ‘계약이행금지가처분’을 내면서부터 문제가 불거졌다.
입찰에서 적격심사결과 최저가 입찰 3위 공동도급업체인 주식회사 보성과 화성종합건설이 최종 낙찰자로 결정되자 상위권 공동 도급업체인 주식회사 남해종합개발 등 2개사가 적격심사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거창군과 낙찰업체를 상대로 진주법원에 계약이행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고, 법원은 일단 담보를 제공하게 하고 가처분을 하여 공사가 중단되었다. 위 가처분에 대한 이의사건과 본안사건을 내가 맡게 되었다. 지금은 거창지원도 합의부가 있지만 당시에는 단독지원이어서 합의사건은 진주지원에서 관할하였다.
원고 측은 “거창군이 적격심사를 하는 과정에서 낙찰회사의 과거 공사실적 중 시공할 필요가 없는 ‘자연 그대로의 녹지면적’을 조경면허가 없는 이 회사의 시공실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부당하므로 계약이행이 금지되어야 하며 계약 자체가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그 당시 거창사건 위령사업 추진이 소송 때문에 중단되자 지역여론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재판을 가능한 한 빨리 마무리하여야 했다.
우리 재판부는 집중심리를 하여 사건 접수 3개월도 안 되어 2001년 4월 13일에 판결을 선고하였고, 쌍방이 승복하여 판결은 확정되었다.
그 후 거창사건 손해배상소송으로 현장검증을 갔을 때 둘러보니 위령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법관으로서 사건을 무난히 해결해주어 참으로 보람을 느꼈던 사건이어서, 나중에 공원 조성이 끝나면 꼭 한번 들러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위에서 얘기한 위령사업에 관한 소송이 한창 심리 중이던 2001년 2월 17일, 거창사건 유족 409명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이렇게 나는 법관으로서 거창사건을 보다 깊이 알게 되었다. 2001년 4월 13일 위령사업에 관한 사건을 마무리 지은 다음 손해배상소송을 본격 심리하기 시작하였다.
원고들은, “거창사건으로 인하여 희생자들이 사망함으로써 희생자 및 그 유족들이 정신적인 고통을 입었음은 경험칙상 명백하고, 거창사건 희생자의 유족인 선정자들이 희생자들의 피고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을 상속받았으므로, 피고는 원고들에게 희생자 1인당 5천만 원의 위자료(공동상속한 경우에는 상속지분별로 분할) 및 원고들 자신의 위자료를 각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였고, 피고는, 거창사건으로 인한 희생자 및 그 유족들의 정신적인 고통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은 시효가 완성되어 소멸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첫 변론기일은 유족들로 법정이 가득 찬 가운데 2001년 3월 30일 10시에 열렸다. 법정에서 피고 측 소송수행자인 군법무관에게 현재까지 행방이 묘연한 지난 51년 당시 군사재판 판결문 원본을 찾아서 제출해 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원고 측의 현장검증 신청을 받아들여 채택하였다.
사실 50년 전의 일을 다루는 사건에서 현장검증은 굳이 필요하지도 않지만, 사건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고 현장에서 목격자의 생생한 증언을 듣는 것은 사안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매우 유용할 것이라는 생각과 유족들의 심정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본다는 생각으로 현장검증을 하기로 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 그 결정은 정말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거창군 ‘신원’ 땅에 가서 ‘신원(伸寃)'을 해주려는 자세였다고나 할까.
2001년 4월 2일자 한겨레신문은, 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물론, 앞으로는 이러한 일이 우리 땅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법정에서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시대적인 소명감에서 이같이 결정했다"고 멘트를 달았는데, 그 당시 내 심정을 거의 간파한 것은 맞다.
2001년 4월 13일은 위에서 얘기한 위령사업 사건의 판결선고일이어서 현장검증기일은 그것을 마무리한 후인 4월 24일 오후 5시로 잡았다. 현장검증 전날인 4월 23일에는 대법원에서 조정실무위원회 회의가 있어 위원으로 하루 종일 참석하여 그 당시 대법원에서 발간 예정이던 ‘조정실무’의 원고를 심의하였다. 현장검증일인 4월 24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하경하였는데, 운무 속을 사뿐히 나는 비행기 속에서 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산하에서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니.
그 날은 현장검증이 하나 더 있어서 오후 1시 30분경 법원을 출발하였다. 먼저 삼천포 사천문화회관 옆 도로공사 방해금지 가처분 사건의 현장검증을 하고 오후 3시경 그 곳을 출발하여, 거창군 신원면으로 직행하였다. 오후 5시부터 ‘거창사건’의 역사적 현장검증이 실시되었다.
미리 약속한 현장에 도착하니 유족들이 수십 명 모여 보상입법을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어, 차에서 내리지 않고 지나쳐 신원면사무소 부근 다방에 들어가 차를 마시면서 원고소송대리인인 박준석 변호사에게 전화를 하여 재판부가 도착하여 현장검증을 하는 동안에는 피켓을 내려놓고 조용히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유족들은 물론 군청 관계자와 현장을 정리하는 경찰관들, TV 카메라가 기다리고 있는 곳에 내려, 정말 대대적인 주목(?) 속에 합동묘소 및 위령탑, 청연 부락, 탄량골, 박산골의 학살 현장을 순서대로 1시간에 걸쳐 둘러보고, 현장에서 생생한 설명을 들었다.
국가공무원이 학살 현장을 찾아온 것은 우리 재판부가 최초라고 했다. 거창사건은 그렇게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현장검증 자체가 유족들에게 조그마나마 위로가 되었을지 모르겠다.
정주환 거창군수가 현장에 와서는 역사적인 현장검증 기념사진을 함께 찍어 위령공원의 역사관에 걸자고 하여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 군수가 오랜만에 거창에 왔으니 저녁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권하였으나 정중히 사양하고, 귀로에 우리 일행 7명(나, 김유범 판사, 이균철 판사, 장찬 예비판사, 이성삼 예비판사, 류재윤 계장, 황종곤 운전원)이 산청읍 강가에 가 메기매운탕으로 저녁식사를 하면서 지리산 산머루주를 한 잔씩 하고 진주 관사로 귀환하여, 뉴스에 나오는 침울한 표정의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현장검증 장면은 그해 5월 15일 저녁 KBS 창원방송에서 현장기록 21 “거창양민학살사건 50년”을 방영할 때 소개되었는데, 내 이름을 ‘황경근’으로 자막 처리를 하여 웃었다.
4월 25일자 경남일보는 그 당시 장면을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거창양민학살 희생자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집단 손해배상청구소송과 관련 법원이 50년 만에 처음으로 거창군 일원에서 현장검증을 실시했다.
창원지법 진주지원 민사합의부(부장판사 황정근)는 거창양민학살사건 유족 409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과 관련 24일 오후 5시 거창군 신원면 박산골 등 학살자 매장현장 등에서 현장검증을 가졌다.
진주지원 관계자와 유족 측 소송대리인 박준석 변호사․거창양민학살유족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된 이날 현장검증에서 법원 측은 양민학살 현장과 피해자들이 묻힌 묘지․노상 이은상 씨가 쓴 비문 등을 살펴보았다.
남자 합동지묘, 여자 합동지묘로 나뉜 학살자 묘지는 지난 61년 4.19 혁명 이후 일부 국회의원과 유족들이 학살현장에 흩어져 있는 피해자들의 유골을 모아 안장한 곳이다.
이번 진주지원의 현장검증은 거창양민학살사건에 대한 사법부의 최초 현장검증이라는 점에서,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고 유족들의 정서를 반영하기 위한 법원의 의지를 구체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소송대리인 박준석 변호사는 “비록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명백한 국가의 잘못으로 피해를 본 유족들이 제기한 소송에 대해 사법부가 법률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현장검증을 실시한 것은 진실을 규명하겠다는 의지의 일단으로 볼 수 있다" 며 “결과를 떠나 뒤늦게 나마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 이라고 말했다.
한편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낸 손배 소와 함께 거창학살사건 관련자들이 명예회복과 함께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관련 특별조치법 개정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그 후 재판은 다른 사건과 함께 순조롭게 진행되어 관련자들의 증언을 모두 청취하고 8월 24일에 변론이 종결되었다. 유족인 문병현, 권도술 이철수, 김용제 씨, 목격자인 문홍한 씨, 참고인인 이일우(전 신원면장),김한용(전 민주공화당 관리장) 씨 등이 증언대에 섰다. 통상 변론을 마감하면 2주 후에 판결을 선고하는데, 이 사건은 기록과 관련 자료가 방대하고 충분한 법리검토도 필요하여 선고기일은 두 달여 후인 10월 26일로 지정하였다. 선고기일 한 달을 앞두고서야 ‘거창민간인학살사건 판결의 기본방향’이 정해졌다. 9월 26일 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한 달 후인 10월 26일에는 거창민간인학살사건 유족들이 제기한 손해배상사건에 대하여 역사적인 판결을 하여야 한다. 한 달밖에 안 남았다. 준비를 철저히 하여야 한다.‘바람 부는 벌판에 외롭게 서서 옳은 판단을 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역사 앞에 자신을 내던지는, 마음을 비운 법관만이 강해질 수 있다.’‘사회정의에 대한 치열한 고뇌와 상식을 존중하는 고도의 균형감각이 필요하다.’판결의 기본 방향은 다음 두 가지다. ‘첫째,거창민간인학살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역사를 쓰는 기분으로 파악․정리하고{진상규명 및 신원(伸寃)},둘째, 학살사건 이후의 계속적인 인권 침해 상황과 국가의 보호의무위반을 인정하여 유족들의 상식적인 정서를 반영하기 위한 법원의 노력과 의지를 드러내야 한다.’

그 무렵에는 ‘양민학살’보다 ‘민간인학살’이라는 용어가 정확하다는 것도 공부하였다.
10월 8일부터 1주일 동안 사법연수원의 부장판사연수에 참석하고,10월 14일에는 하림각에서 아버님 칠순잔치를 하고 진주에 내려오자, 그 1주일 동안에는 다른 판결이 없었던 관계로 주심인 이균철 판사는 기본방향에 따라 판결 초고를 거의 정리해 놓았고,10월 16일에는 위자료 액수 등에 관한 구체적인 합의를 모두 마쳤다. 10월 25일에도 다음날 선고할 판결문을 저녁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거듭 다듬고, 보도자료를 마련하였다. 10월 26일 10시에 법정에 들어가 이유를 약 30분 동안 설명한 다음 주문을 낭독하였다. 민사재판에서는 판결 주문만 낭독하면 되지만, 법정에 와 있는 유족들에게 뭔가 설명을 하여야 할 것이라 생각하여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판결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법관으로서는 경험해 보기 어려운 사건이고 이런 사건을 재판한 행운에 감사하였다.
원고들은, ‘거창사건은 국가의 조직적인 인권유린행위로서 국내법 체계가 예상하지 못한 초월적 위법 상황의 문제이므로, 국가권력의 정상적 법 운영 형태에서만 적용 가능한 소멸시효제도는 거창사건과 같은 민간인학살사건에서는 그 적용이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거창사건 자체로 인한 위자료(상속분) 청구 부분은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고 판단하여 기각하였다. 이 부분 판결문을 보자.

“이 사건 손해배상청구는 결국 민법상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에 다름 아니라고 할 것인바, 실정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 실정법에 따라 청구권을 행사}하는 경우 그 소멸시효 역시 적용된다고 할 것이고(대법원 1996. 12. 19. 선고 94다22927 판결 참조),달리 거창사건 자체로 인한 위자료청구권에 소멸시효 규정의 적용이 배제된다고 보아야 할 근거가 없으므로, 원고들의 위 주장은 이유 없다{원고들은, 피고가 국제인권법(우리나라가 가입한 인권 관련 각종 조약)에 따라 집단학살사건의 희생자들에 대하여 배상을 할 의무가 있으며 그러한 배상의무에는 소멸시효 규정의 적용이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나, 국제인권법의 규정에 따라 국가에게 손해배상의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국내법에 근거하여 청구할 수 있을 뿐이고 국제인권법에 따라 직접 국가에 대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발생하는 것은 아닐 뿐만 아니라, 국제인권법상 민간인학살행위에 대하여는 소멸시효 규정의 적용을 배제한다는 명시적인 규정이 없으므로, 이 사건에서 소멸시효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으며, 민법상 소멸시효가 완성된 손해배상청구권을 부활시키는 문제는 결국 국회의 특별법 제정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창사건 이후의 유족들의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 청구는 받아들였다. 정말 심혈을 기울여 쓴 이 부분 판시는 이렇다.

“(1) 비무장 민간인에 대하여 조직적으로 군사력을 동원하여 그 생명권을 집단적으로 침해하는 이른바 민간인학살사건은, 그 가해자가 한 개인이 아니라 국민에 대하여 우월한 지위를 가지는 국가 자신이므로, 이러한 민간인학살행위에 대하여, 국가는 학살사건 이후에 적어도, 첫째, 민간인학살행위의 진상을 공식적으로 규명하고, 둘째,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적절한 배상을 하며, 셋째, 학살의 책임자를 처벌하고, 넷째, 재발방지책을 마련할 의무를 진다고 할 것이다. 또한, 국가는 그 구성원인 국민의 생명권을 보호할 의무가 있으므로(헌법 제10조 참조),국가공권력에 의한 조직적인 민간인학살행위로 인하여 국민의 생명이 집단적으로 침해되었을 경우에, 국민은 국가에 대하여 그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할 권리(신원권 내지 알 권리)와, 그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손해배상, 재발방지를 위한 사후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할 것이다. 만약 국가가 국민에 대한 위와 같은 보호의무를 다하지 아니한 결과, 희생자들에 대하여 피해를 발생시킨 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살아남은 피해자나 그 유족들에 대하여도 파생된 권리 침해를 계속적으로 야기하는 경우에는, 이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 대하여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위 인정사실에 의하면, 거창사건은 그 당시가 전쟁 상황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피고 예하 국군이 전쟁의 당사자가 아닌 비무장 민간인에 대하여 조직적으로 군사력을 동원하여 그 생명권을 집단적으로 침해한 전형적인 ‘민간인학살사건’이라 할 것인데,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피고는 지금까지 거창사건의 진상을 공식적으로 규명하지 아니하였거나 진상을 밝히려는 노력을 제대로 기울이지 아니하였고, 나아가 거창사건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이나 손해배상에 관한 국가의 보호조치 등을 소홀히 함으로써 희생자 유족들의 신원권 내지 알 권리 및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손해배상, 재발방지를 위한 사후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할 권리 등을 계속적으로 침해하여 거창사건 유족들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입게 하였다고 할 것이므로, 피고는 위와 같은 권리 내지 법적 이익의 침해로 인한 유족들 고유의 손해에 대하여 금전 지급으로나마 위자할 의무가 있다.”

위자료는 희생자를 기준으로 배우자나 자녀 1천만 원, 손자나 형제자매 500만 원으로 하되, 다만, 원고들이 그 중 일부청구한 20만 원씩을 인용한 것이다.
경남일보 사설은 이렇게 적고 있다.

“마침내 50년 만에 6․25 전쟁 당시 숨진 양민들의 명예가 회복됐다. 창원지법 진주지원은 지난 26일 거창사건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국가가 유족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는 한국전쟁 때의 거창․산청사건 등이 전형적인 민간학살사건이라는 것을 법원이 인정한 것으로 그 책임이 국가에 있다는 것을 최초로 밝힌 것이다. 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거창사건이 그 동안 정부에서 주장해 온 ‘통비분자’처단이 아닌,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조직적인 군사력의 민간학살사건으로 규정, 그 책임이 국가에 있으며 이에 따라 유족들에 대한 국가의 위자료 지급의무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했다. 지난 1951년 학살사건이 발생한 지 50년 만에 비로소 양민학살에 대한 대한민국 법원의 공식적이고 올바른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그렇게 나는 2001년 한 해를 진주에서 망자의 한을 달래는 판결을 하며 지냈던 것인데,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그러나 위 손해배상 판결은 항소심에서 취소되었다.
그 무렵 거창사건에 대하여 국가가 보상을 해주는 내용의 거창사건특별법 개정운동을 하던 서울법대 한인섭 교수로부터 선고 며칠 후 전화가 와 판결문을 보내주었는데, 판결이 그러한 보상입법의 실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보았다.

세월이 한참 흘러 대법원은 2008년 5월 29일에야 원고들의 상고를 기각하였다(2004다33469). 나의 1심 판결은 결국 대법원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그렇게 종결되었다.

“피고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이 현저히 부당하거나 불공평하게 되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고, 현 단계에서 거창사건에 관한 국가의 후속 조치는 국민 전체의 여론과 국가 재정, 유사사건의 처리문제 등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입법정책적 판단에 근거하여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입법이 선행되지 아니한 상태에서 법원이 법리적인 문제점을 초월하여 우리 헌법상 권력분립원칙에 위배되는 판단을 할 수 없고, 이러한 취지에서 피고의 소멸시효 항변을 받아들인 원심판결은 정당하다.”

그러나, 1949년 12월 23일 경북 문경 지역에서 국군이 공비토벌작전 수행 과정에서 자행한 민간인 학살 사건의 희생자 중 일부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2011년 9월 8일 ‘민간인 학살 사건과 관련하여 국가가 소멸시효 완성의 항변을 하여 그 손해배상채무의 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현저히 부당하여 신의칙에 반하는 것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2009다66969 판결).

거창 사건 유족 6명은 다시 소송을 제기하였고, 제1심에서는 패소하였으나, 부산고등법원 제6민사부(재판장 신광렬, 판사 박준용, 문상배)는 2012년 11월 22일, 국가가 유족들에게 손해배상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하였다. 내가 판결을 했던 2001년 10월 26일로부터 어언 11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나와 생각이 같은 판결이 선고된 것이다.
나의 판결 이후의 사태 전개에 대해서는, 부산고등법원 2012. 11. 22. 선고 2012나50087 판결의 해당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여 둔다.

거창사건특별법은 심의위원회로 하여금 사망자 및 유족의 명예회복에 관한 사항과 묘지단장, 위령제례 및 위령탑 건립에 관한 사항을 심의․의결하도록 하고(제3조), 유족은 거창사건 관련자의 유족이라는 이유로 어떠한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하고(제5조), 유족의 합동묘역관리사업이 추진되는 경우에 정부가 그 비용의 일부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제8조) 등을 그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고, 희생자나 유족들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 내지 배상은 규정하고 있지 않다.
3) 피고는 거창사건특별법 제8조에 따라 1999년부터 거창사건 합동묘역조성사업에 총 예산 174억 5,600만 원의 재정지원을 하였고, 위 합동묘역조성사업은 2003. 6.경 완공되었다.
4) 한편, 2000. 12. 1. 거창사건 희생자와 유족에 대하여 보상금 등을 지급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거창사건특별법개정법률안이 국회의원 31인에 의해 제안되어 2004. 3. 2.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으나, 같은 달 3. 23.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은 ‘전쟁 중에 일어난 민간인 희생의 보상에 대해 아직 사회적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되지 않았고, 거창사건에 대한 보상이 향후 국가재정에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 예상된다.’는 점 등을 이유로 위 법률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5) 그 후로도 거창사건 희생자와 유족에 대하여 보상 내지 배상금을 지급하는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거창사건특별법개정법률안이 2004. 9. 17. 의안번호 170471호로 제안된 것을 비롯하여 2009. 3. 5. 의안번호 1804054호로 제안된 것까지 8차례나 제안되었으나 국회 본회의 불부의 또는 임기만료로 모두 폐기되었고, 현재 제19대 국회에 거창사건 관련자의 배상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안 2건(의안번호 1900422호 및 1901451호)이 국회의원의 제안으로 계류 중이기는 하지만, 현재까지도 거창사건특별법이나 그 개정을 통한 거창사건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피해배상 내지 보상 조치는 시행되지 않고 있다.
6)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이 위 4)항과 같이 거창사건 희생자와 유족에 대하여 보상금 등을 지급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거창사건특별법개정법률안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한 후인 2005. 5. 31. 법률 제7542호로 ‘항일독립운동,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행위에 의한 인권유린과 폭력·학살·의문사 사건 등을 조사하여 왜곡되거나 은폐된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민족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국민통합에 기여함(제1조)’을 목적으로 하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하 ‘과거사정리기본법’이라 한다)이 제정되었다.
7) 과거사정리기본법은, ‘1945년 8월 15일부터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에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을 그 진실규명의 범위에 포함되는 것으로 규정하는(제2조 제1항 제3호) 한편, ‘국가는 진실규명사건 피해자의 피해 및 명예의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하고(제34조)’, ‘정부는 규명된 진실에 따라 희생자, 피해자 및 유가족의 피해 및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야 하며(제36조 제1항)’, ‘다른 법령에 의하여 제1항의 조치가 시행되고 있는 경우에는 제1항의 규정을 적용하지 아니한다(제36조 제2항).’라고 규정하고 있다.

부산고등법원 2012. 11. 22. 선고 2012나50087 판결은 국가의 소멸시효 항변을 배척하면서 이렇게 판시하고 있다.

“거창사건 희생자 유족들의 명예회복 및 피해보상 등을 위한 지속적인 호소 및 노력의 결과 그 명예회복 등을 위한 거창사건특별법이 제정되고, 이후 그 피해회복 조치를 천명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라 당연히 예정된 후속 절차로서의 피해회복을 위한 현실적인 보상 내지 배상 등 조치를 전혀 강구하지 않은 채로 거창사건 발생일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 피해보상 등을 만연히 미루고 있던 피고가, 더 이상 피고에 의한 적극적인 피해보상 등 조치를 기다리다 지쳐 제기한 원고들의 이 사건 소에 대하여 미리 소를 제기하지 못한 것을 탓하는 취지로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여 그 채무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현저히 부당하여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것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

나도 그 당시에 국가의 소멸시효 항변을 신의칙을 이유로 배척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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